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아는가. 역사상 모든 중국의 황제들 가운데 그처럼 인생의 극과 극을 오간 황제는 찾기 힘들다. 고작 3살의 나이로 청나라 황제에 올라 ‘선통제’가 됐으나 신해혁명으로 인해 퇴위당한 그는 일제가 만주지역에 세운 만주국의 황제로 옹립된다. 일제가 패망한 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붙잡혔으나 1959년 특별사면됐다. 이후 그는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푸이는 사망한지 28년이 지나서야 무덤이 청나라 황릉으로 이장돼 비로소 청의 마지막 ‘황제’로 격상될 수 있었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일개 정원사로 격하된 그의 삶은 일반 백성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굴곡이다. 선통제로서의 그의 삶이 이처럼 고통으로 얼룩진 데는 서구열강의 압박에 기인한 바가 크다. 강력한 무력을 기반으로 한 서양세력의 전례없는 공세에 동양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청나라의 황실이 이처럼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니 변방 국가의 지도자들이 그보다 더한 고초를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0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지 꼭 100년째 되는 해이다. 강제병합 이후 한국은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의 시기를 보냈고 해방 이후가 돼서야 이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가공할만한 경제성장으로 우리나라는 100년 전, 동아시아 변방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세계적인 경제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그러는 사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무너진 조선 황실은 우리의 뇌리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19세기 조선왕조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조선 말기 세도정치 이후로 시작된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정치로 인해 조선왕조의 자주적 발전이 저해됐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야 어찌됐든, 조선황가는 분명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철저히 유폐돼왔고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근대화시기를 그 누구보다 몸으로 처절히 깨닫고 있던 존재,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앞서 언급한 청나라 푸이만큼이나 비극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의 왕으로 군림해오면서 끊임없이 일제의 압력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고 궁에서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안채에서 부인 민자영(명성황후)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 말년에 얻은 소중한 고명딸 이덕혜(덕혜옹주)와 황태자 이은(영친왕)을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강제로 떠나보내야 했다.

서구열강이 동양을 침범했던 상황인지라 모든 결과를 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조선보다 훨씬 부강했던 청나라마저 서구세력에 의해 ‘반식민지화’된 것을 고려할 때, 단순히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는 당시 서구의 침탈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도 외세의 침탈 앞에서 두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에게 조선을 침략한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거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기도 하는 등 일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친일파 송병준을 시켜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일개 신하가 감히 고종에게 “황제가 책임지고 자결이라도 하라”라고 호통칠 정도였다니 배후에 있는 일본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또 1905년 을사늑약이후 그는 왕실의 재정을 풀어 독립운동을 은밀하게 후원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해외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당시 고종의 독립운동 지원과 일본의 방해를 증언하기도 했다.

“저는 소위 헤이그 밀사사건? 당시에 고종황제께서 막대한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본인에게 위탁한 것이 있어서 상하이 노중은행에 예금한 바가 있는데, 그 후 한일합병에 성공한 일제가 그것을 알고 전부 몰수하고 말았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이후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고종은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이시영 등과 연계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도 세웠다. 비록 일제의 방해에 의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고종 자신도 얼마나 일본을 증오했고 벗어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1919년, 68세의 나이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을 거뒀을 때 암살설이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을 자연사로 발표했지만 위의 사건들이나 죽음 당시의 상황으로 비춰봤을 때 독살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승하 직전까지도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궁을 활보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당시 고종의 주검도 암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다. 이가 몽땅 빠져있었고 수의를 입히는 도중 살과 뼈가 분해돼 나왔다는 증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죽기 전날 밤, 고종에게 간식(식혜)를 바친 시녀들이 모두 의문사한 점도 독살 가능성을 높인다. 조선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고종은 그렇게 죽었다.

비록 대중에게 무능한 왕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지만 고종은 당시 백성들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재위시기는 개화기부터 일제가 본격적으로 침략을 하기까지 한국 근대사 전반부에 걸쳐있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나마 국가적 영웅이자 조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강제폐위된 이후에도 조선말기의 실질적 군주였고 순종을 뛰어넘는 민족적 충성의 대상이었다. 그런 고종이 승하하자 그의 장례식을 앞두고 3ㆍ1 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그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고종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종 역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조선왕조를 막지 못했다. 1910년 8월 29일 결국 한일합방조약이 치러졌고 조선 황실은 모든 권력을 일제에 탈취당한 채 ‘이왕가’로 격하됐다. 영친왕은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강제로 혼인했고 고종과 순종을 비롯한 수많은 왕족들은 일제의 감시 속에 살아야만 했다.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일본인 관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합병을 바라보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시각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궁내부의 사무관으로 있던(말이 좋아 사무관이지 순종을 감시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투입한 부하였다) 곤도 시로스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저서 「이왕궁비사」를 통해 한일합병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밝히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의 흐름은 마침내 한일병합으로 이어졌다. 전하께서는 영단을 내리시어 1910년 8월 29일 이조 500년의 통치권을 우리 황상에게 넘기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나라 안팎에 선언함으로써 한일이 일가를 이루는 멀고도 높았던 이상을 실현하셨다.”

이쯤 되면 상황을 이렇게까지 끌고 간 순종이 우둔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순종은 1898년, 다량의 아편이 섞인 커피를 마시고 피를 토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순종은 지적으로 장애가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한일합병조약이 승인된 후 일제는 조선왕조의 신성성의 상징인 건축물들을 동물원, 식물원, 유람지 등으로 격하시켰고 이 과정에서 건축물들을 무단으로 철거ㆍ이전했다. 국왕이 거주하는 궁궐, 역대 왕들의 시신을 모신 왕릉, 신주를 모신 종묘 등 국왕의 신성한 힘을 표상하던 ‘성역’들이 이런 정책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됐다.

이렇듯 당시 한반도를 살던 모든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근현대의 발톱은 황실에게도 이어졌다. 조선의 정궁 경복궁, 경운궁 등의 궁들은 각종 신식건물들에 의해 무참히 철거됐고 경희궁은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마지막 황제 순종이 머물렀던 창덕궁이 그나마 보존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그래도 궁궐은 건축물이기에 대중의 기억속에 남아있지만 정작 그곳에서 살았던 조선 황실의 모습은 순종을 끝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일러스트 주소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