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이 밝은지 벌써 3주가 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설날을 기다리고 있는데요. '설'하면 큰절을 올리고 어른들로부터 받는 덕담 한마디와 세뱃돈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사실 덕담도 세뱃돈도 받을 때가 좋은 법인데, 이제는 좋은 말도 돈도 줘야 하는 입장이라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설을 기다리며 저는 올해 조금 특별한 어른을 만나보고 싶은데요. 오늘도 전주한옥마을 승광재에서 많은 사람들의 어른으로 자리하고 계신 황손 이석님을 만나봅니다.
마지막 황손 이석님
황손 이석님이 머무르고 계시는 곳은 전주한옥마을 내 '승광재(承光齋)'라는 곳입니다. 승광재는 대한민국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빛 '광(光)' 자와, 뜻을 이어간다는 이을 '승(承)'자를 따서 '고종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곳'이란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고 합니다.
눈이 온 승광재
승광재에서는 황손 이석님이 머무르는 곳 외에 다른 방들을 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따뜻하게 쉴 곳으로 내어주기도 하는데요. 마당으로 들어서면 조선의 역사와 단정하게 놓인 장독대, 아담한 한옥의 조화가 매우 정겨운 곳이랍니다.
때론 아주 조용히 때론 아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승광재
태극기가 걸린 승광재에 들어서서 삼삼오오 찾아오는 사람들의 방문을 이상할 것 없이 여기는 황손 이석님 부부를 만납니다. 하긴 저도 몇 해 전 지금 마당에 서 있는 관광객들처럼 '혹시나 진짜 황손이 계실까?'하는 심정으로 찾아온 이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오늘은 황손님의 아주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나누며, 새해맞이 좋은 덕담 선물세트를 받고 싶어서 왔는데 황손님은 제게 온전히 그 시간을 내어주십니다.
첫 인상이 영화배우 안성기씨와 흡사한 느낌을 주는 황손님. 마침 황손님이 주시는 책자에서 두 분이 함께한 사진을 찾았어요!
A. 저는 고종황제의 친손자 이석입니다. 고종황제인 할아버님께는 아들이 셋인데 저의 큰 아버님이 순종황제, 영친왕이 저의 작은 아버님 이십니다. 저희 아버님은 의친왕으로 저는 그의 열한 번째 아들이지요. 얼마 전 영화로 나온 덕혜옹주는 저의 고모님이시지요. 지금은 조선의 마지막 뿌리로서 이곳 전주한옥마을에 터를 잡은 지 열다섯 해 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가끔 동심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파!
A. 제가 41년생이라 한국나이로 치면 77세인데 아직도 쉰이 안 된 것처럼 건강하답니다. 아침마다 오목대를 오르내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데요. 그러다보면 맑은 공기를 자연적으로 마시게 돼 아직까지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박보검·김유정과 함께 경기전에서 찍은 사진을 은근 자랑하십니다
A. 평소 붓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가끔 검도와 수영도 하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볼링장도 가 스트라이크를 날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2015년에는 홀인원을 할 정도로 골프도 제법 잘 치곤 한답니다.
늙어 주책이라 할 지 모르지만 가끔 아내와 싸이의 말춤을 흉내 내보기도 하고, 지난 해 '구르미 그린 달빛'의 박보검과 김유정을 경기전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요.
그리고 K-POP 스타를 배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보기도 하는데 참가자들을 보면서 저의 젊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곤 합니다. 그리고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은 영화입니다. 한 번 마음에 와 닿는 영화는 몇 번씩 반복해서 볼 정도로 영화를 즐깁니다.
Q. 평소 가치관과 정치철학은요?
A. 저는 아름답고 찬란한 역사문화를 가진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나의 자존심과 체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이 승광재를 방문하는데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람냄새 나는 정치인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진정성을 읽을 때도 있습니다.
(웃으시면서) 요즘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요. 정치 철학은 저보다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것이고, 소신 있고 진정성을 가진 정치인은 여유가 있고, 너그러운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용원보다 이제 집에서 머리 자르는 것이 더 익숙하다는 황손
A. 한옥이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의 포근한 휴식처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전주한옥마을도 바람이 불면 저 멀리서 풍경소리가 들리고, 해질 녘엔 굴뚝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왓장과 담 사이에 이끼가 피어나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손님이 다녀간 이부자리를 손빨래하여 다듬이질하고, 이불 홑청에 한 땀 한 땀 손바느질하는 정겨운 어머니의 손길이 출렁이듯이 정이 넘치고 사람이 귀한 한옥마을이기를 기대합니다. 변해가는 세상을 탓하기보다 내가 먼저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여겨지구요.
결식아동돕기에 쓰기 위해 승광재 마당 한켠에서 판매되는 손수건
A. 난세이긴 하지만 올해에는 건강 속에서 행복을 찾고, 나보다 우리를 우선하는 시대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 스스로에게 먼저 다짐해 보려 합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 지금임을 빨리 깨달아야
멀게만 느껴지는 황실과 황실사람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황실이 있었는데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불리는 전주는 지금 마지막 황손이 한옥마을에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계십니다.
후손들에게 역사 바로 세우기와 올바른 역사의식을 거듭 강조하시는 황손 이석님. 세월이 그를 비켜갈 순 없지만 조금은 천천히 지나갔으면 하고 바람으로 하루하루를 사신다는 황손님. 그는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 지금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겁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