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천칼럼15

대한적십자사 초대총재 임명장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 10월 27일에 칙령 제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반포되며 창립되었다. 이 때에 황족인 의양군 이재각이 초대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원래 선조대왕의 아홉째 아들 경창군의 후손이다. 그런데 양자로 입적되어 사도세자의 3남인 은전군의 증손 신분이 되었고,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황족이 된 인물이다. 당시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통탄스럽고 참담한 때였다. 그렇기에 이재각이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로 임명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일제침략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명예롭고 거대한 공식적 직함을, 일제침략시대에 침략자들에게서 공개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1906년) 7월 12일에 의왕(義王)이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면서 이재각은 물러난다. 그런데 채 몇 달도 지나지 않은 1907년 1월 18일에, 다시 이재각이 임시 서리가 되었고 4월 24일에 정식으로 총재에 재임명된다. 매우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의왕은 겨우 약6개월간 총재로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의왕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것을 뜻한다.

당시 의왕은 28세의 싱싱한 젊은이였다. 더구나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정치적 견제를 받아 국내에 있지도 못하고, 국외로 추방되어 떠돌던 암담한 신세였다. 그는 견제를 확실히 받을 만큼 똑똑했고, 임금님 계승 서열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해외로 사실상 쫓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간 해외를 떠돌다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귀국한 때이다. 의왕은 국군 수뇌부인 육군부장(陸軍副將)으로 임명되며 잠시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는데, 그것은 뛰어난 수준의 임금님 계승자라는 생각이 아닌 특수 정치상황이 개재된 것이었다.

침략원흉 이등박문은 철부지 어린이에 불과한 영왕을 황태자로 만들어 놓고서, 의왕을 달래려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전격적으로 임명을 했다. 이것은 또한 해외를 떠돌던 의왕을 귀국시켜서 황실갈등을 유발시키려는 이등박문의 잔꾀 꼼수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이등박문은 의왕의 귀국도, 대한적십자사 총재 임명도 큰 실수라는 것을 황급히 깨닫게 된다.

첫째로 의왕은 상상 밖으로 총명한 인물이었다. 당시 본의 아니게 해외로 밀려나 해외유학을 했으나, 그는 미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생각하면 거의 최초 미국유학생으로서의 국제사회를 아는 황족 신분이었다. 더구나 그가 출중한 견문과 첨단수준의 능력을 가진, 뛰어난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둘째로 의왕은 귀국하자 곧 항일전쟁의 길로 나섰다. 일본침략에 다양하게 정면으로 대응하며, 정국의 핵으로 떠오르는 의왕을 보고 경악했던 것이다. 요즘 의왕의 멋진 서예작품들이 나름대로 여럿 남아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것들은 의왕이 전국을 방랑하듯 몰래 순회하며, 독립의지를 뿌려놓은 주요 사료들이다. 또한 의왕의 총명함과, 풍부한 식견, 그리고 당시의 황실 상황을 말해주는 귀중한 작품들이다.

이에 이등박문은 너무도 놀라며, 즉시 의왕을 경질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단지 6개월 만에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당시 엄청난 소용돌이 풍파가 있었을 것인데, 격노하며 무리하게 물러나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여기서 우선 우리나라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구인 대한적십자사가, 일제침략자들의 뜻에 크게 흔들리며 출발되었음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면으로 항거한 의연한 총재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대한 역사이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뜻에 맞는 자랑스러운 총재로서, 진짜 초대 총재는 의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런 당당한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적십자사가 역사적으로 떳떳한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대한적십자사는 설립의 정당성과 정의로움을 상징하는 최고 보물인, 의왕의 총재 임명장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대한적십자사 차원의 의왕 기념사업도 벌이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의 대한적십자사가 민족기개를 가진 의왕의 전통이 아닌, 다른 전통을 잇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를 이어온 인맥들이, 뚜렷한 역사의식이나 민족적 정의감에 눈을 감고 있었음을 말한다. 대한적십자사는 의왕의 민족의지와 애국정신을 확고하게 재생시켜야 옳다. 역사적 대의명분이 확실한, 정의롭고 당당한 존재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토록 역사적 의미가 큰 의왕의 총재 임명장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런데 현재 완벽할 정도로 깨끗이 모셔져 있다. 아주 다행스럽고 공교롭게도, 이석 황손의 여동생 집에 정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아니 극진하게 모셔져 있다.

의왕은 말년을 흡사 폐인에 가깝게 보냈다. 거의 미친 사람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최고 황족으로 일제침략에 정면으로 항거한 결과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일제침략에 처절히 저항하다가 황족지위에서 강제로 쫓겨나 금치산선고를 받았고, 일제침략자와 친일파들 더구나 자유당 독재시대의 추친일파들에 의해서 까지 끝없이 탄압과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일본인들이 ‘최고의 술주정뱅이’로 만든 악소문에 시달리면서, 6․25전쟁 무렵에 비참하게 작고하였다. 그러니 그 중요한 임명장이 제대로 보관될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이석 황손은 길거리에서 본인의 형님인 이경길 황손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당시 대한황실은 일제침략, 이승만 탄압시대를 겪으며 풍비박산 상태에서 궤멸되어 있었다. 온 나라가 추친일 흐름에 찌들어 있어서, 황실과 황족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무시하던 때였다. 일본침략 시대는 끝났어도,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악선전 모략극은 전혀 멈춤이 없었다. 일제침략에 세뇌된 추친일 먹구름 속에서, 일본인들이 하던 못된 행태가 다분히 잔류해 있던 때였다. 그 암울한 상황에서, 황족들은 황족신분을 숨기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황실가문인 전주이씨 조차도 싸늘한 눈길을 피할 수 없던 참담한 때였다.

이 비참한 때에 의왕이 애지중지하던 아들인 이경길 황손은, 당시 세종호텔 종업원으로 일하며 잠을 잘 곳도 없었다. 최고 황족에서 밑바닥 하층민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남의 눈을 피해 덕수궁 담을 넘어 들어가, 몰래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 황족 신세였다. 당시의 대한황실 참상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비극이었다고 하겠다. 더구나 많은 일반인들은 일제 선전에 세뇌되어, 그런 황족을 오히려 조롱하고 놀리던 추친일병이 대단히 짙은 때였다.

그런데 그가 둥글게 말아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이석 황손이 받아보고는, 생각밖에 아버님의 총재 임명장인지라 깜짝 놀라며 본인이 무조건 인수를 받았다. 의왕이 무릎에 앉히고 항상 귀여워하던 아들이었기에 이경길 황손이 그것을 갖고 있었고, 이경길 황손이 가장 아끼던 이석 황손이었기에 그것이 그대로 인계 인수된 것이다. 실제로는 ‘형님! 어떻게 이런 귀중품을 들고 다니십니까?’ 하고 놀라며 받아든 것일 것이다. 하지만 본인도 한심한 상태로 동가식 서가숙 하는 떠돌이 신세였던 이석 황손이, 여동생을 찾아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유품이라고 철저히 당부하면서 맡긴 것이 오늘에도 이어져 보관되고 있다.

그 임명장의 역사는 대한황실이 처한 참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립고궁박물관이나 대한적십자사에 보관될 대단한 귀중 보물이, 이름 없는 황족의 손에 있다. 아니 이름 없는 평민이 된 공주님 댁에 보관된 것이다. 어차피 평민이 된 비참한 황족들이었기에, 그 임명장은 그 누구도 보살펴 주거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참담한 황실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가정집의 학교졸업장 만큼도 대접을 못 받는 하나의 종잇장으로 전락했던 대한황실의 귀중유물은, 아마도 어떤 지각없는 사람의 손에 있었다면 찢어서 휴지통에 버려졌을 개연성도 컸던 몽매한 우리사회 였었다. 하지만 그 절망적 상황에서라도 그 가치를 올바르게 생각한 황손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것이 구사일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은, 이러한 상황을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이 임명장이 이석 황손의 여동생 집으로 갈 때의 우리사회는, 황족을 흡사 최하층민으로 보던 때였다. 일제침략과 이승만 탄압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한황실이 완전히 잊혀지고 사라진 살벌한 공포의 추친일 시대였었는데, 그 임명장을 일본침략자들이 못된 짓을 하듯이 욕하며 찢어버렸을 개연성은 너무도 컸었다. 일제침략 악선전에 세뇌되어 찌든 대로, 의왕을 술주정꾼으로 매도하며 술주정꾼의 부끄러운 것이라고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그 잔인했던 어둠의 시절에, 이 임명장이 온전하고 깨끗하게 남은 것은 문자 그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정말 놀랍고 놀랍다.

처절하게 탄압을 받았던 대한황실에서도, 항일전쟁의 최전선에서 처절히 싸운 의왕에 관한 것은, 거의 흔적도 없이 짓밟혀지며 사라진 오늘날이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짙다. 그렇다. 공포의 일제강점시대에 철저히 저항하며 짓밟힌 사람일수록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오로지 감옥에서 쓴 서예작품 뿐인 안중근 의사, 그리고 단호하게 정면 독립전쟁을 한 최고황족 의왕은, 최악의 국사범다웠고 최악의 술주정꾼다웠다. 침략자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악소문만 참담하게 남았다.

그들이 가장 미워하고 탄압한 거대한 사람들의 참담한 최후는 그랬다. 그래서 오늘날 의왕의 유품은 이곳저곳을 숨어서 잠행 방문하며 항일전쟁의 신표로 써준 서예작품이 주로 남았을 뿐이기에 더욱 그렇다. 심지어 초현대시대인 오늘날에까지도, 현대판 항일전쟁의 길을 걸은 어느 황손의 고달프고 난감한 삶을 생생히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사회는 일제가 물러가고도 긴 시간을 어둠의 추친일 사회였었다. 그리하여 조용히 평민으로 숨어 사는 잊혀진 공주님이 그 임명장을 보관하게 되었다. 먼 훗날 대한적십자사의 영광된 탄생사를 증명할 수 있길 바라며, 모란이 뚝뚝 떨어지는 눈부시게 찬란한 새봄을 기다리는 숨은 보물이 되었다. 대한황실의 자랑스러운 항일전쟁을 증명하는 귀중한 보물로 생생히 남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