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가을바람이 시작되고
오곡백화가 영글고 피는 음력 팔월 초사흘날
 저 이석 황손은 서울특별시(한양) 종로구 관훈동에 소재한 「사동궁(寺洞宮)」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동궁은 구한말에 지은 서양식 양관에 하늘을 찌를 듯한 절묘한 건축으로
한옥 기와집 궁궐에서 많은 상궁, 나인, 손님, 청각씨라고 불리는 궁을 봉사, 관리하는 사람들에 섞여 살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어김없이「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라는 일본인이 까만 넥타이에 정장차림으로 아버님 義王께 큰절로 문안드리고 한달 생활비를 드리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침 일찍 나이 많은 영감님들이 서넛 궁에 들어와 아버님 침전에서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하고 여쭈면 “에헴.” 하고 아버님께서 대답 같은 기침을 하셨습니다.
 그후에 상궁들이 아버님 조찬(깨죽, 잣죽 등 죽 종류)을 준비하여 올려드렸습니다.
 다 드시고 난 후에 저를 말 앞에 태우시고, 마당을 돌며 운동하셨습니다.

아버님 62세에 보신「이석」은 할아버님 같은 아버님의 어려운 눈매에 고개도 눈도 제대로 못 든 채 모든 행동을 했었는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도 못 들어가고 엄한 궁중의 예절 학습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조금만 뛰어도 상궁, 나인들의 “아씨마마, 아니 되옵니다.”라는 눈초리를 받고 사니 무척이나 답답했고 행동도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다 없어진 궁터는 빌딩의 숲이 되었건만 아버님께서 사용하시던 사무실 앞에 섰던「나라의 기운을 이끈다」는 회화나무 한 그루는 의젓이 버티고 서서 「나는 역사를 알고 안고 있다」는 듯이 언제나 나를 반겨줍니다.
그 당시 사동궁은 조계사 큰 골목에서 동쪽으로는 지금의 수도약국 앞까지 만 여 평의 큰 궁궐로서
제일 서쪽에는 아버님의 여섯째 왕자 이명길(李銀, 李明吉) 형님이 가정을 꾸리고 사셨고,
 일곱째 왕자 이경길(李慶吉) 형님이 북쪽에 위치한 기와집에 사셨습니다.
한번은 일곱째 왕자 경길 형님의 집 앞 감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호되게 상궁들의 질책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사동궁 양관 뒤에 위치한 셋째 공주 이해경(李海慶) 누님의 방에는 피아노가 있어서 음악소리도 듣고 누님의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농담도 자주 들었습니다.
어두워지면 상궁 나인들이 “컴컴한 곳에 가면 망태할아버지가 나온다.”는 주의에 무서워하던 기억이 이제는 먼 옛날의 추억이 돼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