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한 日 낭인들, 잠자던 명성황후 무참히 살해 [조선일보] 을미년(1895년) 10월 7일. 아름다운 가을 밤, 조선의 황후 민씨의 생애 마지막 밤이었던 그 밤에 경복궁 안에서는 흔쾌한 야간 파티가 벌어졌다. 황후 민씨가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宮內府) 대신 내정을 축하하는 자리다. 민영준은 황후의 친정 여흥 민씨 가문의 중심인물로, 청일전쟁 동안 청국에 망명하여 지내다가 귀국한 지 며칠 되지 않는다. 친청파(親淸派)인 그가 정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인 궁내부 대신으로 내정되고 황후가 궁중에서 축하연을 벌인다는 것은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해였다면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시각, 서울 남산자락 일본인 거주 지역인 진고개에서도 질펀한 연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의 충무로 2~3가 파성관(巴城館)이었다. 일본인 검객들과 낭인패들 그리고 서울에서 발간되던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자들이 파성관의 위·아래층을 모두 채우다시피 성황을 이뤘다. 연회치고는 분위기가 색달라서, 술을 마실수록 치솟는 것은 흥겨운 취기가 아니라 매서운 살기였다. ‘여우사냥’.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조선 황후 시해 작전의 실행 명령을 이미 내린 뒤였다. 연회는 출정식이었다. 후일 사가들은 그들을 가리켜 ‘파성관 부대’의 구성원들이라고 불렀다. 10월 8일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의 어둠 속에서 두 연회의 주최자는 경복궁의 높은 담장 안에서 맞부딪쳤다. 흥청거리는 연회 뒤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던 조선 궁중은 칼을 빼들고 들이닥친 살기등등한 일본인들에게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소름끼치는 긴 비명이 궁 안에 울려퍼졌고,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우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 중에 낮게 깔렸다. 이것이 조선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황후 시해의 비극이다. 당시 명성황후가 왜 그처럼 일본인들의 움직임에 대한 경계에 소홀했는지에 관해선 논란이 많다. 삼국간섭으로 잔뜩 위축된 일본을 만만히 본 심리적 오만이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권력자들이 조선의 중전 민씨를 경계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다. 조선 정계 최고의 실력자인 그녀가 호락호락 조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일본 정계 최고위 거물 중 하나로 꼽히는 이노우에(井上馨)는 조선 공사로 온 뒤 중전 민씨를 조선 정계에서 배제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청일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살벌한 전시에는 그런 압력이 그대로 먹혀드는 듯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이내 상황이 변했다. ‘삼국간섭’ 때문이었다. 청일전쟁을 마무리 짓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것이 4월 17일. 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함께 요동반도와 대만 등의 영토까지 할양받은 일본 전국은 온통 승전의 환희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불과 엿새 뒤인 4월 23일 러시아와 독일과 프랑스 3국이 나섰다.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 곧 ‘삼국간섭’이라 이름 붙은 그 사건은 일본의 환희에 냉혹한 얼음물을 끼얹었다. 국제적 압력에 밀린 일본은 피로 얻은 요동반도를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최근세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꼽히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이 잃은 것은 요동반도만이 아니었다. 국가적 체면도 국민적 자신감도 잃었고, 무엇보다도 타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권위와 위엄을 잃었다. 그런 현상은 즉각 대외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변화가 가장 빠르고 역력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청일전쟁의 도화선이요, 전쟁터였던 조선이었다. 청일전쟁 중에는 일본 공사가 한 마디 노호를 발하면 위로는 임금 내외로부터 아래로는 여염의 이름 없는 백성들까지 모두 두려워했다. 그러나 삼국간섭의 전말을 지켜본 뒤로는 정세가 일변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대해 지녔던 두려움이 홀연히 사라져서, 궁중 인사들이고 정부의 대신이고 간에 별 두려움 없이 일본 공사를 무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뿐 아니다.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인 황후 민씨가 앞장서서 ‘삼국’ 중 하나인 러시아와 긴밀하게 손을 잡기 시작했다. 청이 사라진 빈자리에 러시아를 들어앉혀 일본에 대한 새로운 견제세력으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이런 정세 변화에 견디기 힘들었던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가 주한 공사직에서 물러나 귀국해 버린 것이 6월 7일이었고, 이노우에의 추천으로 동향인인 미우라가 부임한 것이 7월 13일이었다. 예비역 육군 중장인 미우라는 총칼을 잘 쓰고 담력도 있어 실전에 능한 군인으로 꼽혔다. 퇴역한 뒤 궁중 고문관이란 한직에 있다가 조선 공사로 부임한 그는 몇 개의 복안을 가지고 왔는데, 조선에 온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감